인간완성 – 81. 無題 1

나를 찾는길에 가장 명쾌하고 빠른 지침서

팔십일일째 날

無題 1

  • ♧ : 저 나왔어요. 
  • ♣ : 어제 어디까지 이야기했지? 
  • ♧ : 임신한 것까지 말씀하셨는데요. 
  • ♣ : 그렇게 늑막염, 복막염으로 쇠약해진 네 어머니는 네 외할아버지가 지어준 한약을 먹고 
  • 차츰 건강이 좋아지며 너를 임신하게 됐지만, 아직 복막염은 낫지 않았고, 몸도 아이를 낳을 정도로 건강해진 것은 아니었다. 
  • 그러자 어른들은 크게 걱정했으니 아이도 산모도 모두 잃게 생겼기 때문이다. 
  • 그래서 낙태를 해야 할 상황이었으나 철저한 천주교인 이었기에 아이나 산모의 운명을 하늘에 맡기기로 하고 말았다. 
  • ♧ : 저런 애물단지였네요. 
  • ♣ : 복막염으로 배에 차는 물을 주사기로 빼냈지만, 네가 자라며 배가 불러와 네 어머니는 버선도 벗고 신고할 수 없었다. 
  • 그러다가 산 달이 가까워지자 다행히 네 어머니의 건강이 약간 호전되며,
  •  그 당시 서울시 공동묘지였던 고태골에서 너를 낳았다(음력 1944년 12월 10 일=서울시 서대문구 新寺洞 144번지) . 
  • 그래서 4년 전에 태어난 네 형과 너는 형제가 됐으며, 너는 차남이었다. 
  •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태어났으나(서대문구 중림동 약현성당=세례명 아오스딩), 
  • 네 어머니는 병고에 아이까지 낳자 젖이 나오지 않았고, 건강이 너무 나빴다. 
  • 이때 마침 네 아버지는 영등포 고무공장에 취직해 네 할아버지 집을 나와 네 어머니 네 형과 딴 살림을 냈다. 
  • 그러자 할 수 없이 너는 고태골 본가(本家)인 네 할머니 집에서 네 할머니가 맡아 키우게 됐으니, 
  • 그때는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지로 의식주가 몹시 어려운 시기였기에 갓 난 너에게 먹일 음식이 마땅치 않아 너는 미음과 소 젖으로 그날 그날을 연명하였고, 
  • 정제되지 않아 지방질이 모유의 15배인 소 젖을 그대로 먹은 너는 설사가 끊일 새 없어 병을 달고 살았다. 
  • 네가 얼마나 몸이 약했던지 3살이 넘도록 힘이 없어 제대로 걷지도 못했고, 
  • 너무 말라 얼굴은 눈 뿐이었으며, 앉을 때도 너무 힘이 없어 두 팔로 앞을 받혀야 했기에 개구리 같이 앉았다. 
  • ♧ : 제대로 먹지 못해 그 정도로 몸이 약했군요. 
  • ♣ : 어쨌든 너는 그렇게 태어나 젖도 못 먹었지만 네 할머니의 지극 정성으로 생명을 유지했으니, 
  • 그때 네 할머니가 너를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키웠던지 늙어 망령들어  정신없을 때 너만 찾았고, 운명할 때도 너만 찾았다. 
  • 그 후 네 어머니가 너를 데리고 친정 갔을 때 몰골이 앙상한 너를 본 네 외할아버지가 “그 아이 커서 어디 사람 구실하겠냐? 갖다 버려라.”고 했다며, 
  • 네가 12살이 된 1957년 6월 네 어머니는 죽기 전까지도 네 외할아버지를 섭섭해 했다. 
  • 그러다가 네 나이 3년 6개월 정도 지난 1948년 늦 여름, 
  • 네 몰골을 본 네 아버지가 저러다가는 결국 아이가 죽겠다 싶어 너를 네 아버지 집으로 데려 갔으니, 
  • 드디어 너를 포함한 4식구는 명실공히 한 가족이 되었다. 
  • 잘 듣거라. 여기까지 가 첫 번째 매듭이다. 
  • ♧ : 여기까지가 첫 번째 매듭이라니요? 
  • ♣ : 듣기만 해라. 
  • 그 다음, 1948년 늦 여름부터 명실공히 한 가족이 되어 출발한 너희 가족은 네 아버지가 영등포 고무공장 작업반장으로 있다가, 
  • 1950년 6 ·25 전쟁이 터지자 네 아버지는 아래 동생 둘이 파출소 소장인 것을 동네 사람들이 다 알아 숨어 지냈고, 
  • 그러다가 1951년 1월 고태골 친척 10여 명과 함께 온 가족이 서울을 벗어나 충청남도 부여로 피난 가게 되었다, 
  • 네 아버지는 부여에서 피란민 마을 반장을 맡게 되었고, 피란민들은 유엔에서 보낸 구호물자로 살았다. 
  • 그러다가 그 이듬해 1952년 봄 외국에서 들여온 개량종 ‘레그혼’ 달걀을 부화하여 기르기 시작했으니, 
  • 이 당시는 달걀이 지금과 달리 몹시 귀해 10개면 쌀 한 말과 맞바꾸고도 거슬러 받았다. 
  • 그 이듬해인 1953년 봄에는 닭이 40여 마리로 늘어 하루에 몇십 개씩 알을 낳았으며, 여름에 닭 병이 돌아 닭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. 
  • 생활은 유엔에서 주는 배급으로 충분했기에 가정 경제는 갈수록 풍족해졌으니(만 8세) , 
  • 이때가 너희 가정이 생활하던 중 가장 안정되고 풍족하고 평화로운 시기였다. 
  • 잘 들어라. 여기까지가 두 번째 매듭이다. 
  • ♧ : 네, 알았습니다. 잘 듣고 있어요. 
  • ♣ : 한편, 네 아버지는 피란민 반장일을 보면서 부여군청을 드나들며 알게 된 피란민 중, 
  • 동경제국대학을 나온 농학박사 황선영 씨와 귀암면에 농과대학(후에 백제중학교가 되었음)을 설립해 황선영 씨가 교장이 되고, 네 아버지는 교감이 됐다. 
  • 그리하여 1953년 봄, 첫 신입생을 모집하게 되었는데, 
  • 1953년 봄은 한창 전쟁 중이었고, 당시 대학생은 군에 입대 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웃 돈을 얹어 입학하려고 했었다. 
  • 이때 황 교장은 웃 돈을 많이 주는 사람부터 뽑자고 했고, 네 아버지는 시험을 쳐서 실력대로 뽑자고 하였으니, 
  • 두 사람 사이에는 갈등이 생기게 되었고, 드디어 생사를 함께할 듯 가깝던 황 교장과 네 아버지 사이에 입학생 문제로 말썽이 나기 시작하였다. 
  • ♧ : 예, 그때가 자세히 생각납니다. 
  • 그 당시 아버지는 받은 입학금을 큰 포대에 담아 자전거 에 싣고 오셔서 방 천정에 숨겼다가 이튿날 가져가시곤 했지요. 
  • 지금도 생생히 기억나는 게 저녁마다 집에 오시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부정직한 황 교장의 이야기를 하시며 걱정스런 의견을 나누시더라고요. 
  • 지금도 제가 기억하는 것은 부정입학을 아버지가 끝까지 반대하시자 황 교장이 몇몇 사람을 따로 입학시켜 달라고 부탁하더래요. 
  • 그래서 알아봤더니 황 교장이 뒷 돈을 받았더라고 어머니에게 말씀하시며 아버지가 속상해 하시더라고요. 
  • ♣ : 그때 기억이 지금도 나냐? 
  • ♧ : 네, 사실 저도 그 당시에 부모님의 이야기를 곁에서 들으며 철저한 천주교인으로 순교자의 자손이신 아버지가 옳다고 생각했고, 
  • 저는 그때부터 부정부패에 굴복하지 않으시는 아버지가 대단히 자랑스러웠으며, 그런 아버지를 존경하게 됐어요. 
  • ♣ : 그렇구나. 네 나이 만 8살이 넘었으니 기억날 만도 하다. 그럼 이제부터는 네가 이야기해라. 
  • ♧ : 그냥 하던 대로 하세요. 제가 모르는 것도 많이 아시던데요. 
  • ♣ : 그럼. 다시 시작한다. 
  • 그렇게 네 아버지가 황 교장과의 부딪힘으로 속상해하며 부여군청을 드나들 때 알게 된 천황록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니, 
  • 이 사람은 이북에서 피난 온 사람으로 충남 서산군 해미면에 사무실이 있고, 현장은 고북면에 있는 ‘피난민 정착사업소 ’ 소장이었다. 
  • 그 사람이 네 아버지를 부 소장으로 영입하겠다고 여러 번에 걸쳐 제의하고 있었다. 
  • ♧ : 천황록 씨요? 기억나요. 눈도 크고 목소리도 굵고 뚱뚱하고 잘 웃어요. 
  • ♣ : 이제 기억이 난다고 제법 참견하는구나. 
  • ♧ : 네, 아는 게 있네요, 
  • ♣ : 그러자 네 아버지는 황 교장의 부정으로 학교 일이 마음에 안 들어 착잡했는데 천 소장이 그런 제의를 하자 네 어머니와 상의하게 되었고, 
  • 그 결과 부소장으로 가기로 했으니, 1953년 늦가을 네가 초등학교 2학년 2학기 때 너희 가족은 해미로 이사했다. 
  • 그곳에 가보니 천 소장 역시 피난민들에게 나오는 배급 물품을 부정으로 처분하여 착복하고 있었다. 
  • 처음엔 설마 했으나 장부와 현물이 차이가 많아 회의 때마다 네 아버지는 따졌으며, 그 결과 네 아버지와 천소장 일파는 또다시 정의와 불의로 갈라지게 되었다. 
  • ♧ : 맞아요. 기억이 나요. 약간 추운 어느 날이었어요. 
  • 어느 날 밤 아버지가 저와 형을 부르시더니 큰 다리 밑에 가서 누가 창고에서 물건을 꺼내 가는지 숨어서 보라고 하시더라고요. 
  • 그래서 형하고 둘이 다리 밑에 숨어서 보니까 창고에서 꺼낸 물건을 여러 사람이 자전거에 잔뜩 싣고 계속 나가더라고요. 
  • 그러고 보니 그 당시 몇 년간은 아버지와 황 교장의 갈등과 아버지와 천 소장의 갈등이었네요. 그리고 그 당시 아버지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어요. 
  • 악한 일을 하면 하느님의 벌을 받으니까 황 교장이나 천 소장은 반드시 하느님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, 철저한 천주교인이며 순교자의 후손으로서, 
  • 청념결백하시기에 자랑스럽고도 존경하는 아버지의 그런 말씀을 듣는 저 역시 악한 일은 반드시 하느님의 벌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지요. 
  • ♣ : 그랬구나! 너는 그때의 상황과 네가 존경하는 아버지의 그런 말을 들으며 선(善)과 악(惡)에 대한 개념이 확고해졌구나. 
  • ♧ : 그런가요?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네요. 그 뒤에 아버지께서 들으셨다는 소식인데요. 
  • 황 교장은 아버지와 헤어지고 2년 후 중풍으로 죽었고요, 천 소장도 아버지와 헤어지고 2 년 후 중풍으로 죽게 됐다는 소식이 왔대요. 
  • 아버지께서 그 이야기를 하시며 악한 짓을 했기에 그들은 당연히 벌을 받았다고 하셨어요. 
  • 그때는 저도 아버지의 말씀대로 그 사람들이 하느님의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지요. 
  • ♣ : 이렇게 네 아버지가 천 소장 일파와 선(善)과 악(惡)으로 대립하여 갈등을 빚고 있을 때 네 아버지는 가끔 서울을 다녀오곤 했는데, 
  • 그때 네 아버지 외가에 친척 되는 사람이 네 아버지에게 일제시대 때 호황을 누리던 야(夜)시장 회사를 같이 설립하자고 제의 했다. 
  • 그러자 천 소장 일파와 깊은 갈등이 싫었던 네 아버지는 네가 4학년 2학기 때인 1955년 늦가을 스산한 바람이 불 때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다. 
  • ♧ : 네, 기억납니다. 그때 큰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뒤 칸 틈틈이에 식구들이 끼어 타고 오는데 뚜껑이 없어 늦가을 바람에 많이 춥던 기억이 나요. 
  • ♣ : 그렇게 서울 삼각지 네 이모네 옆으로 올라오자 일단 너희 집은 일정한 수입이 없었고, 
  • 그때까지 저축했던 돈으로 생활도 하고 회사 설립에 필요한 자금도 들어갔으나 회사 설립은 지지부진했고, 
  • 1년 이상을 끌다가 1957(만 12세)년 봄에 야시장 허가가 당시 동대문시장연합회 회장이던 이정재 (5·16 때 정치 깡패로 사형)에게 떨어져 너희 집은 폭삭 망하게 되었다. 
  • ♧ : 기억나요. 그때 폭삭 망해 우리는 결국 삯월 셋방으로 쫓겨났으니까요. 
  • ♣ : 그래, 그 충격으로 계속 몸이 약했던 네 어머니는 그해 6월 19일 죽었다. 
  • ♧ : 그렇게 집안이 망하고 어머니까지 돌아가신 그해 1957년 6학년 겨울방학에는 저라도 돈을 벌어야 하겠기에, 
  • 을지로 6가 방산시장에 있던 지하실 장난감 공장에 취직했는데 연탄가스 냄새로 머리가 많이 아팠던 기억이 나요. 
  • 이듬해 봄이 되자 아이들이 선생님이 졸업식에 참석하라고 하신다고 찾아왔더군요, 
  • 그래서 졸업식에 참석하고 우등상장과 그 당시엔 귀했던 한글사전과 졸업장을 받아왔어요. 
  • ♣ : 잘 들어라. 여기까지가 세 번째 매듭이다. 
  • ♧ : 웬 매듭이 자꾸 나와요? 
  • ♣ : 두 번의 매듭이 더 있다. 
  • ♧ : 그래요? 
  • ♣ : 그래 너희 집은 망해도 그렇게 망할 수가 없었지. 너희 가정은 아주 최악의 상태가 이어 졌으니까. 
  • 네 아버지는 웬만큼 사는 집에서 5년제 휘문고등학교 전기과를 졸업 후 집안이 망했기에, 
  • 이런저런 막 일은 해보지 않아 할 엄두도 못 내 사글세 방으로 쫓겨난 뒤에도 수입이 없었으니, 
  • 너희는 1957년 겨울을 근처 우동 공장에서 나오는 우동 부스러기로 끼니를 때웠다. 
  • 그러다가 사글세도 못 내 결국 이듬해(1958년) 초여름에는 쫓겨나 집 없는 빈민들이 모여 사는 한강 모래사장으로 천막 치고 나가게 되었는데, 
  • 너희는 천막 살 돈마저 없어 집에 있던 오래 돤 고급 괘종시계(세이코)를 팔아 그 돈으로 천막을 샀다. 
  • ♧ : 예, 기억납니다. 
  • 한강 모래사장에 천막치고 나간 우리는 그 뜨거운 여름 뙤약볕에서 수영하러 온 사람들에게 제가 도넛, 찐빵, 아이스케키 등을 받아다 팔아서 먹고살았지요. 
  • 아버지는 그냥 집에만 계시더라고요. 
  • ♣ : 네 형은 17살이었기에 노동판에 뛰어들었지. 
  • 그러기를 몇 개월 지나 9월 15일 비가 많이 와 한강에 홍수가 나 천막 치고 살던 빈민들은 서울시의 조치로 미아리 송천동으로 이주 했고, 
  • 그해 겨울 내내 서울시에서 밀가루 배급을 주었다. 
  • 그러자 너희 3부자는 배정받은 산비탈을 평평하게 골라 약 16평 쯤 되는 땅에 블록으로 집을 지어 지붕은 기름종이를 얹어 방 둘에 부엌 하나 3칸 집을 지었고, 
  • 봄이 되자 여기저기서 가내 수공업 일거리를 찾아 그럭저럭 먹고 살았다. 
  • ♧ : 그때 저도 일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옮겨 다녔지요.
  •  혜화동에서 흑석동까지 다니는 합승택시 차장도 하며 거기서 먹고 잤고, 중림동 다방에서 커피도 끓이고 심부름도 하며 먹고 자기도 했지요. 
  • ♣ : 한편, 네 아버지는 부근에 집 짓고 이사 왔던 아이 셋이 있는 과부를 알게 되어 동거하기 시작했다. 
  • ♧ : 기억이 납니다. 59년 늦 겨울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갔더니 아버지는 우리 집을 팔고 그 아주머니 집으로 아주 들어 가셨더라고요. 
  • ♣ : 먹고살기 위해 너희들이 나가 있으면서 가끔 집에 왔으니 네 아버지는 너무 외로웠지. 
  • ♧ : 그랬겠지요. 저도 그 당시에는 어려서 몰랐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참 외로우셨겠어요. 
  • ♣ : 너도 나이 먹으니 알겠지? 
  • ♧ : 아버지께서 그렇게 되시자 제가 그 아주머니 집에 계속 있기가 좀 그렇더라고요. 
  • 그래서 1960년 3월 20일에는 부근에 있던 기와공장에 취직했습니다. 그런데 일이 얼마나 힘든지 만 15세의 저에게는 무리였어요. 
  • 몇 달은 버텼는데 도저히 더 이상 못 버티겠더라고요. 
  • 그래서 8월이 되자 그만두고 강원도 삼촌 집에 가서 13일간 쉬다가 다시 서울로 올라와 삼각지에 사는 이모 집에 갔지요. 
  • 그랬더니 마침 이모네가 식구들끼리 집을 대대적으로 수리 하고 있었어요. 
  • 그러니까 이모가 저 보고 갈 곳이 마땅치 않으면 집 짓는 데 심부름이나  하라고 하더군요. 
  • 그렇게 몇 달 어느덧 집도 다 짓고 가을이 됐어요. 
  • 어느 날 이모와 시장을 가는데 동네 어귀 큰길 입구에 깨끗한 이발소가 눈에 보이더군요. 
  • 흘깃 들여다보니 최고급 시설로 큰 어항도 있고 열대수도 있는 등 눈에 확 띄었어요. 좋아 보였던 저는 무심코 “저런 데서 일해 봤으면 좋겠다.”고 했더니,
  • 이모가 “그래? 그럼 내가 말해 볼까? 이 집이 나하고 계 같이하는 집이거든. 
  • 그런데 요즈음 이 집 여자가 계를 다시 만든다고 나보고 하나 들어 달래. 그러니까 너를 써주면 계를 든다고 해볼게. ” 하시더군요.
  • 사실 삼각지는 우리가 해미에서 올라와 망할 때까지 몇 년 살던 곳이라 동네 사람들은 저를 알지요. 
  • ♣ : 이젠 네가 기억한다고 다 설명하는구나. 
  • ♧ : 그렇게 됐나요? 
  • ♣ : 더 계속해라. 잘하고 있다. 
  • ♧ : 그러더니 이모가 그 이발소 집에 들렸고, 곧 이발소집 아주머니가 저를 보자고 한대요. 
  • 갔더니 이발소 집 아주머니가 ‘얼굴도 예쁘장하고 꼭 이발소 타입’이라며 내일부터 당장 일을 나오라고 하더군요. 
  • 그래서 이튿날부터 이발소에 들어가 머리 감는 것부터 배웠지요. 
  • ♣ : 그게 몇 월 며칠인지 기억하냐? 
  • ♧ : 네, 1960년 11월 8일이지요? 
  • ♣ : 그래, 맞았다. 여기가 네 번째 매듭이다. 
  • ♧ : 그래요? 그러면 매듭은 끝난 거예요? 
  • ♣ : 아니다. 한 번 더 있다. 다시 기억나는 대로 이야기를 계속해라. 
  • ♧ : 예, 그래서 거기서 머리 감는 것과 안마를 배웠지요. 이렇게 이발소에 들어간 후 그 일이 저에게는 안정된 직업이 되었어요. 
  • 세월이 흐르며 그렇게 직업이 안정되자 저는 차츰 주변 사람들과의 부딪침인 인과관계를 생각하게 되었고, 
  • 그러다 보니 결국 ‘약속을 꼭 지키고 상대에게 더 주지도 않고 더 받지도 않는 방식’이 가장 이상적인 인과관계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 다. 
  • 지금도 생각하면 그때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, 이것을 노트에 메모까지 하며 ‘이상적인 대인관계’를 연구했답니다. 
  • ♣ : 잘하고 있다. 더, 계속해라. 
  • ♧ : 이렇게 꼭 주고받으며 생활하면 아무 문제 될 것이 없을 줄 알았는데, 이러한 세월이 약 3년 여가 흐른 1964년 4월, 
  • 믿고 있던 동료가 이권이 개입되자 태도를 순식간에 바꾸는 것을 본 저는 ‘나만 잘해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.’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습니다. 
  • 이러한 생활방식이 완전한 인간관계일 수 없다는데 큰 충격을 받게 되었고, 
  • 그 때까지 연구한 인과관계에 깊은 회의를 느껴 삶에 의욕을 잃을 정도로 깊은 고민에 빠졌습 니다. 
  • 그렇게 깊은 고민에 빠져있기를 7개월,  이 후 종로에 있는 신신백화점 구내  이발소로 옮기게 되었고,
  • 1964년 11월 중순 주인 집에 회식 차 갔다가 책꽂이에 꽂힌 톨스토이의 『인생독본 』을 보고는 느낌이 이상한 한 제목에 마음이 끌려 빌려보게 되었습니다. 
  • 그리고 『인생독본』을 읽은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. 
  • 왜냐하면, 인과관계를 포함한 삶에서 이런 생각과 문제로 고민하고 방황한 사람이 나 뿐만이 아니고, 
  • 인생독본의 구절들을 깨달은 사람들은 모두 저와 같이 삶의 깊은 번민 속을 헤맷던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. 
  • 그래서 완전한 인간관계에 살기 위한 저의 삶 목적은 다시 방향이 결정되었으니, 
  • 저는 인생독본 내용을 완전히 소화하려고 한 줄 거리를 읽으면, 그 뜻을 모두 알게 될 때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 읽었고, 
  • 곧 그 뜻대로 실천에 옮겼으며, 결국은 제가 천주교에 큰 공을 세운다는 12세 때의 신탁이 바로 이 길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. 
  • 이때는 누가 저에게 시비를 걸고 모욕을 주고 업신여겨도 또 자존심을 참을 수 없이 건드려도 끝까지 참고 무저항으로 넘겼습니다. 
  • 그리고 모든 고통은 순간만 넘기면 되고, 그것이 일생이 되어 육신이 죽으면 저는 영광스러운 진리의 삶을 산 것에 기뻐하리라 생각했던 것이지요. 
  • 또 육신의 고통은 원자로 이루어진 물질이 느끼는 것일 뿐, 정말 저의 생명인 정신이 느끼는 것은 아니며, 
  • 오히려 육신은 정신의 평화를 깨뜨리는 적(敵)이니, 육신을 괴롭혀 고통을 참는 것은 곧 정신이 육신을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. 
  • 그리하여 저는 어떠한 고통이라도 얼마든지 참아넘기려 했고, 실제로 닥치는 모든 어려움을 참아 넘겼습니다. 
  • 한편으로는 교회의 건물을 보면 건물 지을 돈으로 헐벗고 굶주린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옳고, 
  • 정말 진실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교회 건물이 없어도 빈 터에서 예배보는 것을 전혀 싫다 하지 않을 것이며, 
  • 하느님도 진정 그것을 원하실 것이라고 생각 했습니다. 
  • 그리고 이왕 교회를 지었으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이 보시기엔 누구 나 똑같은 당신의 자녀인데, 
  • 하느님의 뜻대로 하느님을 섬긴다는 교회 자체가 왜 문을 잠그고 수위실을 두며?, 
  • 그 추운 겨울에 떨고 있는 집도 없고 의지할 데 없는 수많은 노숙자를 왜 못 들어가게 차별하는지…? 
  • 예수도 자기를 따르려면 모든 것을 팔아 어려운 사람들을 주고 따르라고 했는데, 
  • 교회 사무실이나 간부 사무실은 스팀과 좋은 가구가 있고 아무나 못 들어가게 하는지? 
  • 또 미사 때에 신부가 입는 옷은 왜 그렇게 좋고 화려해야만 하는지…?
  •  ‘만약 미사 때 앞에 누더기를 걸치고 추위에 떨고 있는 사람 이 있다면, 
  • 그 옷을 당장 벗어 입혀주기를 하느님께서는 진정 원하실 것이 아닌가?’ 하는 등 의문이 생겼습니다. 
  • 그래서 추운 겨울 어느 날, 
  • 이런 의문에 대해 성당에선 어떻게 해명하는지 듣기 위해 명동성당에 가서 교회의 간부(자칭 노기남 대주교 비서) 3~4명이 있는 곳에서 토론했습니다. 
  • 처음에는 제가 미치거나 성당에 트집 잡아 구걸하러 온 사람인 줄 알았다가, 나중에는 제가 묻는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고 한참 토론을 벌였습니 다. 
  • 그리고는 모인 사람들의 결론이 결국 “인간은 약하여 그 모든 것을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.”라는 것이었습니다. 
  • 아울러 ‘하느님이 실제로 존재하는가?’ 하는 의문에는, 
  • 자칭 신학교 4학년 학생이 “하느님의 존재에 대하여 인간은 어느 정도 이상은 도저히 알 수가 없다. 
  • 그러므로 인간은 더 알려고 하는 것 부터가 미련한 것이다.” 그러고는 결론이 “남들이 있다고 하니 그냥 믿으면 된다.” 였습니다. 
  • 더구나 어떤 사람은 “믿어서 손해 날 것이 있느냐?”는  이야기까지 했습니다. 
  • 이후 저는 교회나 성당에 대하여 환멸을 느꼈으며, 
  • 인간이 진실하게 사는 것은 오직 편견 없이 파헤친 인생독본의 뜻만이 옳다고 생각하게 되어, 더욱 인생독본을 파고들며 뜻대로 철저히 실천하려 했습니다. 
  •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같은 아들딸이면 모두 형제자매인데 그런 입장에서 저보다 조금이라도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, 
  • 당연히 나와 동등한 처지로 이끌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저는 제가 소비하는 모든 것을 절약했고, 
  • 또 어딘가에 있을(인도, 파키스탄, 방글라데시, 아프리카 등) 하루 3번 식사도 못하는 사람들을 생각하여 식사량도 아주 최소한으로 줄였습니다. 
  • 그랬더니 항상 배가 고프고 기운이 없어 어쩌다 한번 웃으면 웃음이 잘 그쳐지지 않았고, 또 배가 몹시 고프니 말도 하기 싫고 모든 것이 귀찮기만 했습니다. 
  • 이렇듯 육신은 괴롭지만 마음 만은 진리로 알고 있는 최후의 한계점까지 실천하고 있다는 생각에 보람을 느껴 항상 행복하고 또 한없이 평안하고 고요하기까지 하였습니다. 
  • 또 겨울이라 밖에 나가면 거리에 어려운 사람들(지게꾼, 신문팔이, 껌팔이, 버스표팔이, 거지 등)이 즐비한 때라, 
  • 저는 눈에 띄는 대로 주머니가 텅 빌 때까지 무조건 남모르게 돈을 나누어 주곤 하였습니다. 
  • 이 때는 옷도 물론 사 입지 않고 입던 삼각팬티 하나는 추위에 떨고 있는 거지 아이를 입혀 보내, 
  • 하나 남은 팬티로 밤에 빨아 아침에 입거나, 덜 말랐으면 바지만 입고 있거나 하였습니다. 
  • 정신은 육신이 헌 옷을 입거나 벗고 있거나 관계없고, 오히려 참고 헌 옷을 입으면 그것은 곧, 더 어려운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. 
  • 그리하여 그 고통을(마음은 행복했지만 고통으로 느껴졌음.) 일생 동안 견뎌 먼저 가신 뭇 성인들의 뒤를 밟으려 했던 것입니다. 
  • 이 당시 저의 느낌은 영혼이 거추장스러운 그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,
  • 아주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고 순수한 알몸인 것 같은 경험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상쾌하고 황홀한 기분이었습니다. 
  • 오랜만에 머리부터 샤워기 물을 맞으며 목욕하면 한없이 날아갈 듯 상쾌한 기분이듯이. 
  • ♣ : 됐다. 오늘 네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자. 
  • 이제 아까부터 내가 매듭이라고 한 이유를 알려주겠다. 
  • ① 첫 번째 매듭이라고 했던 1945년 1월 23일(양력)부터 1948년 늦여름까지(3년 6개월) , 
  • 네가 어렵게 태어나 부모와 떨어져 할머니 밑에서 젖을 못 먹어 설사와 잦은 병으로 고생하던 3년 6개월 간은, 
  • 구약 때 이스라엘 민족이 수백 년간 이집트에서 갖은 고생할 때와 신약 때 출발부터 어렵게 시작해 로마제국의 박해로 순교가 이어지던 300~400년 시기와 일치하고, 
  • ② 두 번째 매듭이라고 했던 1948년 가을부터 1953년(8세) 봄까지는, 
  • 네 아버지가 할머니에게서 너를 데려와 제대로 된 가정을 이루었고, 이때에야 비로소 너희 가족은 네 아버지를 중심으로 하나의 가정으로서 체계가 세워졌으니, 
  • 이 시기는 예수의 아버지 요셉 때와 마찬가지로 네 아버지가 구약 판관과 신약 교구장의 역할이었다. 
  • 구약과정과 신약과정에 있어서 300~400년의 어려운 시기를 지나 비로소 하나의 집단으로 발전하는, 
  • 구약 때는 판관시대에서 전성기인 왕국시대와 신약 때는 교구장시대에서 전성기인 기독교 왕국시대까지 이어진 느낌의 동질시기 이다. 
  • ③ 세 번째 매듭은 1953년 가을부터 1957년(12세) 봄까지, 황 교장과 천 소장이 네 아버지와 善과 惡으로 갈리며 대립하던 시기로서, 
  • 구약과정 때는 유대(善)왕국과 이스라엘 왕국(惡)으로 갈렸고, 신약과정 때는 동후랑크와 서후랑크와 이탈리아로 갈린 시기와 같은 의미다. 
  • ④ 네 번째 매듭은 1957년 봄부터 1960년 3월 20일과 11월 8일(16세)까지로, 네 아버지가 폭삭 망해 갖은 고생으로 방황하던 시대로서,
  • 구약 때 이스라엘 민족이 포로로 잡혀가 갖은 고생할 때와, 신약과정 때 교황의 포로생활로 교단이 어려움을 겪으며 방황할 때와 일치한다. 
  • ⑤ 다섯 번째 매듭은 1960년 3월 20일부터 1965년 2월 20일까지다. 마르틴루터가 1517년에 종교개혁을 부르짖고 수십 년 후, 
  • 성경번역을 완료하여 일반인이 성경을 직접 볼 수 있도록 펴내며 개신교의 출발이 시작되었듯, 
  • 1960년 3월 20일에 집을 나와 방황하다가 1960년 11월에야 드디어 안정된 직장을 갖게 되었다. 
  • 이것은 1960 년 3월 20일(만 15,17세)부터 네 나름의 자율적 판단 시기가 시작되다가 1960년 11월 8일에야 안정된 직장이 생겼고, 
  • 그렇게 안정되자 1961년 4월부터 3년간 구약시대 사람들과 똑같이 꼭 갚아 제로(0)를 체험하는 생활이 시작되었으며, 
  • 그러다가 1964년 4월부터 11월까지 7개월간은 구약 말기 사람들과 똑같이 꼭 갚아 제로(0)를 체험하는 삶이 완전한 인간관계 일 수가 없다는 커다란 좌절과 방황을 맛보았다. 
  • 그러다가 7개월이 지난 1964년 11월 중순부터 1965년 2월 20일까지 3개월간 신약과 같은 인생독본을 읽고 철저히 체험함으로써, 
  • 신약시대 사람들의 느낌을 모두 철처하게 체험하게 되었으니, 이것은 곧 1945년 1월 23부터 1965년 2월 20일까지 20년 과정에서, 
  • ① 자녀인 인간이 부모이신 하느님과 ‘인과관계’를 맺어 우주원칙을 정립한 천주교인이, 
  • ② 구약과정 2,000년과 신약과정 2,000년, 
  • ③ 그리고 꼭 갚아 제로(0)를 체험하는 구약 진리와, 
  • ④ 이해와 양보로 제로(0)를 체험하는 신약 진리를 모두 체험한 것이었다. 
  •  
  • 이것은, 
  • ① 아담에서 노아를 거쳐 아브라함에 이르러 자녀인 인간이 부모이신 창조주 하느님의 뜻을 우선으로 체험하는 우주원칙 인과관계 성립 후, 
  • ② 야곱부터 예수까지 꼭 갚아 제로(0)를 체험하는 구약과정과, 
  • ③ 예수부터 지금까지 이해양보로 제로(0)를 체험하는 신약진리를 성장시켜온 하느님과 하나 된(合一) 같은 질의 앎(체험)인 것이다. 
  • ④ 그 결과 앎의 질이 하나(合一)된 전체성(0)의 하느님과 개체성의 너에게 움직임의 원칙이 흐르기 시작했으니. 
  • ⑤ 하느님의 뜻은 너를 통하여 드러날 수 있게 되었다. 
  • 그 이후 너에게 있었던 일들은 내일로 미루자.